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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감정쟁이

저는 변호사입니다. 변호사하면, 맨날 법정에 나가서 피터지게 말싸움하고, 상대방 말꼬리 잡거나, 인신공격하는것이 주된 업무인것처럼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께는 죄송하게도 저는 법정에 딱 한 번 가봤습니다. 그것도 무슨 멋있게 배심원에게 폼잡으면서 얘기를 하려고 간것이 아니고...그냥 법대 졸업하고 변호사 선서할때, 축하해주러 오신 어머니와 사진 찍은 그게 다입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변호사하면, 무슨 법전을 딸딸 외워서, 물어보기만 하면 "형법 125조 57항에 의거하면 말이지"하고 입에서 3.74초만에 나올것이라 기대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책을 펼치기만 하면 나오는것을 왜 머릿속으로 외우고 다니겠습니까. 암기는 바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변호사인 제가 하는 일은 뭐냐구요? 간단히 말하면, 뭔가 얘기를 했을때 남들이 알아듣도록 이유를 대는것, 그것이 변호사인 제 직업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어떤 주장에 설득력있게 논거를 대는것"이, 그리고 그 논거를 간결하면서도 조리있게 글로 쓰는 것이, 변호사인 저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 "논거"라는것이, 사실 무한대로 댈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과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굉장히 드물거든요. 살인이라는것 -- 절대악이라구요? 그렇지만 아직도 선진국,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많은 나라들에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사형도 엄연한 살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이라크에서는 시시각각 별 죄책감없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어떻게 보면 "당연히 나쁜" 일도, 이렇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옛날에 제가 대학원때 의료법을 수강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의사이자 변호사이신 교수님께서 안락사에 대해서 한 10명쯤 되는 우리들에게 갑자기 물었습니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사람 지금 손들어보라구요. 그러자 학생들은, 아직 왜 찬성하는지 왜 반대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생각도 해보기전에 교수님께서 물으셨기에, 머뭇머뭇거리며 아무도 손을 못 들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머릿속에 박혀서 떠나질 않습니다.

사실 어떤 이슈에 대해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이성으로 논리나 이유를 정리해보기 전에...듣는 순간 몇초내에 "감정"이 시킨대로 이미 결정하는거 아니냐고, 저희에게 물었습니다. 논리와 근거는...이미 감정에 의해서 결정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위해, 뒤에 갖다붙이는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지금도 그냥 그 감정이 시킨대로 벌써 안락사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마음을 먹지 않았냐고. 자신은 왜 안락사에 찬성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물어본것이 아닌, 그저 마음이 시킨대로 이미 결정한, 안락사에 대한 찬반여부만을 물어보는 것이기때문에, 학생들이 2, 3초내에 대답 못할 이유가 없다구요.

저는 이 말에 참으로 동감했습니다. 제가 늘 믿어왔던, "논리적 근거 --> 결정"의 과정이 아닌, 반대로 "이미 감정으로 결정 --> 근거로 포장해서 정당화"가 사실 제 사고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던, 소중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정규교육이라는것이 100% 쓸모 없었던것은 아니었나봅니다.

저는 이명박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왜 공무원으로서 자격미달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제 생각들을 조리있게, 근거를 가지고 말씀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명박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들중에서는...이명박이 괜찮은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논리있게 전개할 수 있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겁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대로, 근거라는것은 수없이 갖다붙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수없는 근거를 들더라도, 제가 이명박을 싫어하는것은...결국 "그냥 싫으니까"라는 감정에 의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한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명박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무리 여러가지 이유를 대더라도, 결국 "그냥 좋으니까"라는...이성이 아닌 감정이 앞서는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동성애, 자본주의, 미국, 결혼, 입시제도, 인종차별, 남북관계처럼 조금은 거창한 이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제가 벨기에산 맥주를 즐기는 이유, 홍명회의 글을 좋아하는 것, 눈이 반짝빤짝 빛나는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처럼 조금은 사소하게 보이는 생각들까지도, 사실은 듣는 바로 그 순간, 근거나 논리전개를 하기도전에 이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생각하니 많이 허무합니다. 변호사라는 제 직업이, 사실은 이미 "직감"에 의해 정해진 마음에, 그럴듯한 이유를 여기저기 갖다붙이는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태까지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과대평가를 해온것은 아닌가하고 문득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은 결국 감정의 동물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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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redhawkblog.tistory.com BlogIcon 붉은매 2009.02.10 07:55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사실 어쩌면 '직감'이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판단'이자 '감정'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말씀 하신 것처럼 본능적으로 내린 판단에 대해서 나중에 미사여구는 한없이 생산해 낼 수 있을테니까요.

    맨 처음에 드는 '직감'과 나중에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
    어느쪽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적어도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감정은
    '직감'이 더 많이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어느쪽을 선택하든지...가장 중요한건 '선입관'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저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전 흑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그 친구를 알고 나서 조심하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제가 제 입에서 '검둥이'란 말이 안나오게 하는데 2년이 걸렸습니다.그만큼 제 안에 '선입관'이 뿌리박혀있었다는 소리겠지요...앞으로도 더 많은 선입관을 제거해 나가고 싶습니다.


    괜히 엉뚱한 소리만 한것 같네요 ^^;
    건강하세요~

    • Favicon of https://seoulchris.com BlogIcon 사용자 seoulchris 2009.02.15 15:18 신고

      앗 안녕하세요 붉은매님. 심하게 누추한 제 블로그에 발걸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입관에 대해서 정말 동갑합니다. 저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 "배운것이 많다"는 것은...곧 "선입견이 적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은 세상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것을 아는거. 그래서 다른 피부색,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이나 자기와는 다른 생각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볼줄 아는것.

      말로는 쉽지만 삶속에서 실제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지"하고 하루에 한두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축복받으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스스로가 고정관념과 선입관이라는...도수높고 삐뚤어진 안경을 쓴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제 아무리 쓸데없는 가방끈이 길다 할지라도) 절대 다수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슬픈 모습 아니겠어요. ㅠㅠ

      건강하세요!

  • Favicon of http://bacon.tistory.com BlogIcon Bacon 2009.05.02 20:46

    일리가 있는 글인 것 같아요. @_@ 공학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특히 컴퓨터 쪽은.. 자기가 얼추 보기에 그럴싸한 걸 일단 해놓고 거기에 이론/수식을 가져다 붙여서 설명하려고 하죠.. -_-;; 저도 그걸 최근에 알았답니다.

  • Favicon of https://seoulchris.com BlogIcon 사용자 seoulchris 2009.05.03 10:05 신고

    공학까지 그렇다는 말에는 조금 놀라고 갑니다. 사실 연구결과 발표했을때도 보면...그런것같아요. 제약회사가 스폰해주는 연구는...그 제약회사에서 원하는 결과가 도출되고, 정부가 밀어주는 연구는 정부의 정책을 밀어주는 쪽으로 신기하게도(?) 답이 나온다는 ㅎㅎ

    어찌도 그렇게 밀어주는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들만 깜쪽같이 나올수 있는것인지. ㅠㅠ

    어쩌면 과학이나 논리니 아무리 떠들어도, 어쩌면 그것들은 "갖다붙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합니다.

  • =_= 2009.07.28 23:39

    이 글이 참으로 기억에 남아쓰. 한 달 지나서 다시 찾아와보게 되다니.

  • MrsDarcy 2009.10.08 00:43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상당한 논리적 이유에 의해서 판단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성향(감정)이 먼저 반응하고 거기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 같아요...그렇게 생각하면 왜 많은 사회적/개인적 이슈 혹은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지도 조금은 설명이 되네요. 성향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타인의 성향을 바꿔야한다는 말인데. 성향은 논리적인 이유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 혹은 감정이므로 바뀔 수가 없죠. 그리고 혹 표면적인 분쟁에서는 승패가 결정된다하더라도 본질적인 성향을 바꿀 수 없었다면 실질적인 분쟁은 계속 되어가는거고;;;

    • Favicon of https://seoulchris.com BlogIcon 사용자 seoulchris 2009.10.11 12:17 신고

      네. 언젠가 유시민이 그랬던게 생각납니다. 어떤 의견에 서로 차이가 생겼을때... 소통이라는것도 어느 순간에서는 무의미해진다구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얘기했는데도 논쟁이 결론이 안날 경우네는... 끝까지 토론을 하는 대신 그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한다구요.

      저는 그것이... Darcy여사님 말씀대로 성향자체는 논리적으로 바뀔수 없기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작은것이든, 큰것이든 분쟁이 일어났을때도... 아무리 논리적인 대화를 하려해도, 그냥 싫은데 어떻게 하겠어요. ㅎㅎㅎ 그냥 성향자체가 다른데 어쩌겠어요. 그때는 그냥 "그래, 너는 너구 나는 나다"고 인정을 하고,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는게... 나을지도 모르죠. ㅎㅎㅎ

      그렇게 못하니까 지금도 싸움이 끊이지 않는거겠지만.ㅠㅠ

    • MrsDarcy 2009.10.12 22:59

      네 ㅎ 그래서 바라는 것은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ㅎ 그것이 열린사회든 다원화된 사회든지간에요 ㅎ

    • Favicon of https://seoulchris.com BlogIcon 사용자 seoulchris 2009.10.14 07:29 신고

      "다른거"랑 "틀린거"랑 구분을 못하는 분들이 (저포함) 너무 많지요. 근데 진짜 문제는, 절대다수가 자기가 그런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거겠죠. ㅎㅎㅎ

    • Favicon of http://wrinkle6.egloss.com/ BlogIcon MrsDarcy 2009.10.14 21:53

      근데 그래도 seoulchris님은 구분하려고 하잖아요 ㅎ 그게 중요하죠 모 ㅎ 사실 그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다른 걸 모두 다 인정하게 되면, 결국엔 인정해서는 알 될 것들 예를 들어 모 식인? 이런 것까지 인정하게 될 수도 있으니깐요 ㅎ 예가 너무 무식하네요 ㅋ

      그래서 제가 하고 픈 말은 Seoulchris님처럼 '다른' 것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ㅎ

    • Favicon of https://seoulchris.com BlogIcon 사용자 seoulchris 2009.10.18 12:54 신고

      노력하는것... 중요하지요. 하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의 편견은 잘 사라지지 않더라구요. 또 제가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걸 인정하는건... 더더욱 어렵더라구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