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월초입니다. 2009년 12월 31일 정각에 5년째 하던 일을 그만두고... 4일동안 미친듯이 짐을 싸고 1월5일에 미국에서 도쿄로 건너온 이래 벌써 3개월이나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모든 생활이... 이제는 설레임도 서서히 사라지고 일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다고 했을때... 여기저기서 참 많은 조언을 들었습니다. 워낙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다짜고짜 "나 일하기 싫어. 그냥 때려치우고 일본에 살러갈건데 좋은 아이디어 같지않냐?"와 같이 남들이 보기에는 좀... 골이 쉰 사람처럼 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또 그에 상응하는 많은 충고들을 들었지요. 그럴때마다 남이 잔소리하면 "니가 대체 뭔데"하며 한귀로 흘려듣고 다른 귓구녕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무슨 습관같이 된지라 쿨럭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마음을 뼛속까지 새기며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으로 들었지만... 백수 된 이후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그동안 까맣게 잊게 되더라구요. 그렇지만... 요즘은 그때 가족, 친구, 동료, 선후배들께서 해주신 말들이 순간순간 떠오르기도 합니다.
제가 백수가 되기전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야 니가 지금 싫어도 또 막상 백수되면 일하는게 그리울게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한참 부지런하게 일하다가 갑자기 백수가 되면, 놀면서도 마음이 괜히 불편하고... 때때로 다시 넥타이 매고서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일하는게 그리워질거라는 얘기였습니다.
이제 백수된지 3개월. 정말 그 분들의 말씀에 새삼 동감하게 됩니다... 가 아니고, 그분들께서 저에게 그런 개구라를 치셨던 이유는 대체 뭐일까요. 혹시 인성에 문제가 있는걸까요. 아님 자랐을때 애정결핍이었던걸까요. 애정결핍이었다면 지금이라도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게 좋을텐데 왜 저한테 그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던걸까요. 그리고 그립기는 뭐가 그립다는걸까요. 밤 11시에 집에 가려는데 사무실에 불려가서 선배가 내일 아침 8시까지 해놓으라고 일 줄때가 그리울거란거였나요. (하도 자주 들어서 그 선배 말투까지 생각납니다. "8 o'clock, sharp, Chris, and I mean lazer sharp") 아니면 미팅때마다 "최상의 법률서비스를 의뢰인에게 제공하는 것만이 이 불경기를 살아남는 법"이라며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연설을 2시간씩하던 우리 로펌 파트너의 모습이 그리웠을거란 얘기였을까요. 어쩌면 아침마다 조용한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저 인간은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쳇바퀴 도는 다람쥐로 환생하여 나처럼 이렇게 매일 출퇴근 하는걸까"하며 경건한 명상에 잠기곤 했던 그 시간이 그리울거란 얘기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의 기대(?)와는 달리 저는... 연방증권법 15조8항이니 계약서니 파생금융이니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느니 마니... 하는 제 인생에 아무 영양가도 없는 것들에서 3개월 벗어나며 제가 하고 싶은것들만 하고 사니 "이런게 사는거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거라 그토록 확신했던 직장생활에 대한 그리움은 커녕... 다시 "정상적인"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루에도 몇십번씩 할 정도로 지금이 좋습니다.

꽃놀이도 갑니다.
두번째로 많이 들었던 얘기는... "너 이제 백수 되면 심심해서 지겨울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히 뭔가 할 작정을 하고 온것이 아니라서 인생이 따분해질까봐 저도 이 말 듣고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막상 와보니... 딱히 할일도 없습니다. 매일 14시간씩 일하다가 갑자기 근로시간이 0분이 되고나니 조금 어색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지금 생활이 좋은 이유는... 제가 원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기때문... 이겠죠. 저는 여기 심심하려고 온 것이거든요. 그게 일이든 노는것이든 매일매일이 스케줄로 꽉 차서 있어서 하루하루를 흥미진진하게 보내는 생활을 바라고 온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저를 위한 시간. 지난 몇십년간 남의 눈을 위해서 살았다면 지금은 제가 하고 싶은 작은 일들을 - 그게 설사 집에 오는 길에 아무 생각없이 생맥주 한잔을 하는것이라 할지라도 - 이것저것 해보면서, 저와 제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느긋하고 덜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심심하다는 생각보단... 그냥 여유롭다는 느낌만 가득합니다. 열심히 뛰어다니는게 아니라... 지나가는 나무나 꽃도 구경하면서 산책하는 기분이라고 하면 될까요.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뭔가를 하려고 할때마다, 주위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너 그러면 결국 그런 기분으로 살거다, 막상 니가 그걸 또 경험하면 저럴거다 등등.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도 알아야하겠지요. 어차피 저란 인간이 때로 허세를 부려도... 마음속으로는 제가 아직도 많이 어리다는걸 자주 느끼거든요. 그래서 주위에 저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을때마다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하지만 때론... 남의 말이 아닌, 그냥 자기만의 느낌을 따라 인생을 꾸려가는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때는 꼭 말이 안되더라도 말이죠. 그렇게 되면 최소한... 후회나 다른 사람 원망같은건... 안하게 되는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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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봄날 씨애틀에서 한량처럼 지냈던 생각도 마구 나구요.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재밌게 놀까 고민(?)하면서....
그때 백수짓을 마치고 떠나는 비행기에서 '살면서 나한테 이런날이 또 올까'하는 생각에 울컥했었거든요.
결국은 그런날이 오지 않은채로 5년이 지나고, 슬슬 다시 그날들이 많이 그리워지고 있었는데... 글 보니까 마냥 부럽기만하군요.
좋은 시간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정말 이 시간도 언젠가 끝날거라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조금 우울해집니다. 그때 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이라도 달라져있을까요. 달라져있다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운명의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그래도 오겠죠. 와야겠죠.
언젠가 레이니님께서는 갔다오고나서 어떤 기분이셨는지 꼭 한번 얘기해주세요. 물론 저랑은 조금 다른 상황에서 갔다오신것같지만 그래도 듣고 싶어요. 그럼.
겨우 몇 개월 논 것 갖고
'이렇게 놀아도 일 하고 싶은 마음은 안 생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좀 더, 징하게 놀아보길!
네 말이 맞는것같아. 그래서 앞으로 한 10년쯤 더 놀아볼라구 하는데 뜻대로 될까 모르겠네. 사실 직장이라는걸 가지게 되더라도 좀 노는 기분으로 일하는게 최강일텐데. 노는건지 일하는건지 구분이 안 가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분들에게 가르침도 받고 싶어. 가르쳐준다고 되는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부러워만 하면서 일하고 있네요 ㅠ_ㅠ
일요일인데도 일하시나봐요. 다가오는 한주도 재밌게 보내실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리고 여행할 기회가 없으셨다고 조금 아쉬워하는것같은데... 지금 아예 외국에서 사시잖아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잘 모르지만... 저는 직접 사는게 그냥 여행만 하는것의 1000배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재밌는 한주, 좋아하시는 일하시면서 보내시고 계시길.
그래서 나 가을에 배타고 떠날려고ㅎㅎㅎ
일하시면서 고민 많으신가봐요. 무엇인가 멋진 조언을 해드리고 싶지만... 제가 능력, 경험 그 어느 하나 그럴 처지가 못되어서 아쉽네요. 죄송해요. -_- 단지... 제가 5년째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이렇게 빵빵놀기 ㅎㅎㅎ 까지... 저도 망설임이 참 많았거든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제가 그동안 노력해왔던 (남들은 성취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들, 그리고 불안한 미래가 압박이었거든요. 말도 못 할 정도로. 하지만 인생 정말 한번이라는것. 우리네 삶, 어차피 불안한 비정규직이라는것. 그리고... 우리 사는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라는것. 그런것들 마음속 깊이 새겨두면서 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할수 있었던것같아요.
힘내시고 화이팅.
요즘에 종종 고민을 합니다. 저는 사실 제가 하고 있는 공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뭐.. 하다 재미없으면 치우지라는... 생각을 쉽게 했었는데...
요즘... 만약 결혼을 하고 반려자도 일을 하고 싶어한다면.. 같은 도시에서 직장을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무래도 미국의 이 큰 땅덩어리에서 사실 어디에서 직장을 잡을 수 있는지는 약간 로또라는 생각이 듭니다. 취업도 그렇지만.. 교수 자리라도 알아 본다면.. 정말 어디 (대학이나 도시)로 갈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가고 싶은 자리와.. 아내가 가고 싶어하는 자리가 서로 다르다면.. 과연 내가 얼마나 내 자리를 양보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처음엔 "그냥 포기하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양보하기 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런 것도 좀 요즘엔 좀 고민이에요.
저는 그렇거든요. 제가 주제넘게 베이컨님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는것은 당연히 아니구요 ^^;;; 몇년후에 직장을 잡는 문제, 그때 어떻게 아내와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하고 적정선을 잡을지는... 그냥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저는 생각해요.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것만으로도 행복한 그 느낌을 최대한 감사히 여기면서 살고, 함께 즐거이 할수있는 지금 이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행복하는데 집중하는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일은 그때 닥쳐서 해도... 짧은 인생 살아보니 그렇게 해도 다 잘 되더라구요. ^^;; 그리고 지금 하시는 고민들이 (제가 보기엔)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딱히 답이 시원하게 나오는것도 아니잖아요. ㅎㅎㅎ 언제나 지금을 가장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거. 말로는 쉽지만, 그리고 너무 뻔한 얘기인지라 베이컨님께 드리기에 쑥쓰러운 얘기지만... 그래도 요즘 제 인생의 방향잡이거든요. 앞으로도 그러고 싶구요. ㅎㅎㅎ 행복하세요.
저는 워낙 프리랜서에 가까운 일만 했지만 그래도 늘 때려 치고 다른 일 할 생각만 했었죠 ...
그러게요, 왜 그리울까요? ... 왜 그렇게 말들 할까요?
그래도 역시 ... 돈 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고시 준비하던 어느 선배가 넥타이 매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다 ,는 얘기를 했을 때도
전 참 의아했어요 ,붙고 나서 직장 일에 매어 허덕일 때도 그 말 나오자 보자, 했죠 ㅋㅋ
암튼 잘 읽고 갑니다 ~
남의 삶에 대해서 조금은 쉽게 그렇게 단정하시면서 말씀하시는 분들은 조금은 덜 겸손하시기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삶이라는게 한가지의 법이 있는게 아닌데... 조금 다르게 산다고 해서 그게 덜 행복한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조금은 답답해요. 가까운 분들이 그러면 조금 괴롭기도 하구요.
그리고 남의 떡이 부러운 것은 그냥 인간의 타고난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그렇게 불행한 동물일지도 모르죠. ㅎㅎㅎㅎ
일주일 잘 보내세요
결정 내리시고 나서 지금 어떻게 사세요?
고민하시는것같은데... 결정은 내리셨는지, 내리셨으면 어떤 쪽으로 내리셨는지 매우 궁금해요.
최근인줄 알았는데 보니까 이미 시간이 꽤 흘렀네요
저는 똑같은 직장을 9년째 다니고 있어요
이 직장을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이 일을 사랑했는데도, 권태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요?
올해는 휴직을 준비하고 있는데, 과감하게 그만둘지 고민중이예요
일단 저질러 보면 알게 될텐데..^^ 너무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글들이서
웃음이 먼저 나왔네요 고마워요~ ㅎ
이글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미래 어느 순간 또 멋진 일을 계획중이라면
여기다가 글을 올려줘봐요~ 참고하게요~ ^^